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고 다카모리 (문단 편집) === 외모와 동상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Takamori_Saigo.jpg]]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이고의 [[초상화]]는 메이지 16년에 그가 죽은 지 6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친동생인 [[사이고 주도]](西郷従道)의 윗얼굴과 사촌동생인 오야마 이와오(大山巌)의 얼굴의 아래부분을 섞은 몽타주 초상화다. 실제 사이고 다카모리는 생전에 사진찍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암살을 피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막부 말기 당시에는 좌막파와 도막파 간의 암살이 많았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에 대해 서신으로 비판할 정도였다. 따라서 사이고의 실제 얼굴은 동시대의 인물들만 알 수 있었고, 사이고는 생전 메이지 덴노의 "사진을 찍으라"는 명령도 거부했다.[* 메이지 덴노 본인 역시도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 [[천연두]]를 앓아 죽을 뻔했는데 그때의 흔적으로 얼굴이 얽었기 때문.''' 즉위식할 때 전통 관복을 입은 사진을 자세히 보면 하관에 천연두 곰보 자국이 보이며 수염을 기른 것도 이걸 가리기 위해서였다. 여관들에게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궁중에서 양장을 입는 것을 허락할 정도였고 메이지 본인도 공무가 아니면 양장을 입지 않았다. 신정부의 교육제도를 정할 때에도 서구식 학제를 따르자는 메이지 신정부 인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유교 사상을 토대로 교육제도를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서구적 근대화를 추구하던 유신정부의 개혁군주라고 하기에는 매우 전근대 지향적이고 극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한 인간이었다.] 참고로 사이고의 오른쪽 이마에 탈모 흔적이 있는데, 생전에 [[곰방대]]로 오른쪽 이마를 긁적이는 습관이 있어 탈모의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파일:external/31.media.tumblr.com/tumblr_m0k830RH1z1qfud8c.jpg|width=300]] [[도쿄]] 우에노 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 위의 초상화를 토대로 만든 동상. 동상의 제막식에 참석한 사이고의 아내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실제 얼굴과는 다른 듯하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 9권 1장 굽씨의 오만잡상에 따르면 사이고 동상이 세워지기 5년 전인 1893년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동상으로 세워진 오무라 마스지로의 얼굴이 아래서 보기에 너무 높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사이고 동상 얼굴은 아래에서도 보기 쉽게 큼지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옆에 개도 같이 있다. * [[파일:MhxhjQqr.jpg|width=500]] [[파일:8OoFnK6r.jpg|width=500]] [[파일:8fbX00nr.jpg|width=500]] [[파일:T5Fz92Tr.jpg|width=500]]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2기 7화에 나오는 그의 동상들. 가고시마시의 시로야마 공원에 있다. '''개가 없는 이유''' - 도쿄 우에노 공원에 있는 [[유카타]]를 입고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동상은 1898년 제작된 것으로 한창 [[메이지 유신]] 관료들이 일본 정국을 지배하던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시기로, 그 메이지 관료들과 맞섰던 털털하고 반관료적인 서민적인 이미지의 다카모리 상이 추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고, 가고시마의 육군 대장[* 사실 사이고는 근대 일본 최초이자 유일한 계급으로서의 육군 원수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때의 일본 육군 원수는 20세기 즈음과 달리 서구 각국과 마찬가지로 계급으로서의 육군 원수였다.]의 군복을 입은 동상은 [[쇼와 시대]] 초기에 만들어져 한창 일본이 한국도 집어삼키고 군국주의에 들뜬 시기로 정한론의 선견지명을 가진 군인의 이미지의 다카모리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이유는, 정한론 논쟁으로 오쿠보 도시미치 등과 의견충돌을 일으키고 집에서 출근 거부를 하던 시절, 메이지 6년(1873년) 건강을 염려해서 메이지 천황이 독일인 서양의사 호프만을 보냈고, 진단을 받고 비만 치료를 위해서 가벼운 조깅과 산책을 하라고 처방을 내렸기 때문. 가고시마의 향토 요리인 비계가 듬뿍 달린 [[삼겹살]]+갈비살 조림요리, 돼지고기 야채 볶음을 좋아해서 자주 먹었고, 단 음식을 좋아했던 것이 비만의 원인이었다. 사이고는 취미가 [[낚시]]와 사냥개를 데리고 산에서 사냥하는 것이었는데[*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이라서 낚시하고 사냥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그 날 그 날 하루 먹을거리를 조달하는 방책이었다], 도쿄의 저택에는 사냥개를 여러 마리 길렀다고 한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8%82%A5%E5%BE%8C%E7%9B%B4%E7%86%8A%E7%AD%86%E3%80%8C%E8%A5%BF%E9%83%B7%E9%9A%86%E7%9B%9B%E5%83%8F%E3%80%8D.jpg]] 가장 비슷하다고 평가받는 초상화, 히고 나오쿠마(肥後直熊筆, 1866 ~ ?)의 1927년작. 사이고 다카모리 상「西郷隆盛像」(黎明館蔵) * [[파일:1a868494e222d6ada2e16e7e81b5ffae_9050002c45ea56c912c11e5a00cfb40b.jpg|width=320]] 전 쇼나이 번 사족 이시카와 시즈마사가 메이지 8년 4월경에 사이고를 직접 만났는데, 이 때의 인상을 기초로 세월에 걸쳐 그린 초상화. 이를 본 가고시마 출신 서양화의 거장 구로다 세이키가 영명높았던 문하생, 사토 히토시에게 권해 다이쇼 2년에 완성시켰다. 사이고의 부인 이토, 자녀들의 감정을 거쳐 완성시킨 작품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외모를 그린 상상화 중 가장 실물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 [[파일:DSC_1511.jpg]] [[염사]]로 만들어진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진. 자세히 보면 프로필 상상화와 외모가 비슷하다.--그러나 사이고가 이 염사로 만들어진 사진을 싫어할 듯-- * [[파일:3412412419.jpg]] 사이고의 외모에 대해 다룬 몇 안되는 동시대의 그림. 좌측 그림 밑에 西鄕吉之助(사이고 기치노스케)라고 쓰여져 있다. [[안세이 대옥]] 당시에 만들어진 몽타주로 추측된다. 중앙의 인물은 [[타카스기 신사쿠]]. * [[2019년]] [[1월 13일]], 사이고 다카모리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히라노 고가쿠(平野五岳, 1811-1893)가 그린 초상화가 발견되었다.[[https://matome.naver.jp/odai/2148057626423543101|해당 블로그]] [[http://imgcc.naver.jp/kaze/mission/USER/20161201/71/7306501/60/182x256x145875238aea9cdb3d17a573.jpg|이미지]] * 메이지 5년([[1872년]]) [[메이지 덴노]]가 오사카 조폐국에 행차했을 때 촬영된 사진에 사이고가 찍혀있다는 설이 있다. 당시의 기록에도 실제로 사이고가 메이지 덴노를 수행하여 오사카를 방문했다고 한다.[[https://www.sankei.com/article/20180416-RWI23VMAHVJIXLXWSAA32XKYI4/|#]] 다만 앞쪽에 찍힌 인물들의 경우 계급이 다소 낮아보이는 점, 체격이 닮지 않은 점을 들어 사이고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